왜 정책은 늘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가 ─ 행정 기억이 사라지는 국가의 구조적 문제

정권은 바뀌고, 교훈은 사라진다

기록은 남지만 학습은 없다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지 못하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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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쌓이는데 기억은 사라진다

 

“왜 우리는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관이 교체될 때마다, 심지어 부서장이 바뀔 때마다 정책은 새로운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혁신, 뉴딜, 디지털, 전환, 재도약. 화려한 수식어는 늘 앞에 붙지만, 몇 년 뒤 감사 보고서와 국회 자료 속에서 발견되는 문장은 거의 비슷하다. 준비 부족, 현장과의 괴리, 부처 간 협력 부재, 성과 지표의 왜곡, 사후 평가의 미흡.

정책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제는 실패가 축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패는 반성으로 남지 않고, 교훈은 제도화되지 않으며, 기록은 문서함 속에서 잠든다. 그렇게 행정은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다음 정책은 “전례 없는 도전”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다시 출발선에 선다.

행정은 방대한 보고서와 매뉴얼, 평가 자료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기억은 아니다. 기억은 경험이 제도에 반영될 때 완성된다. 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절차가 수정되고, 같은 혼선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준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기억은 살아 있는 자산이 된다.

그런데 우리 정책 현장에서는 정권 교체와 인사 이동이라는 시간표가 학습의 시간을 압도한다. 정책의 평균 수명이 짧고, 담당자는 순환보직으로 바뀌며, 장기적 축적은 개인의 노트북 안에 머물다 사라진다. 기록은 남지만 기억은 단절된다. 이것이 바로 ‘행정 기억 상실’의 출발점이다.

 

 

제도보다 사람이 먼저 바뀌는 시스템

 

대한민국 행정은 촘촘한 규정과 방대한 문서 체계를 갖고 있다. 예컨대 국가 차원의 언어 정책과 기준을 정비하기 위해 추진된 “2014년 표준 국어 문법 개발” 사업은 체계적 범주화와 위계화, 자문회의와 워크숍을 통해 점진적으로 내용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 또한 “문장 문법성 판단을 위한 기초 자료 구축” 사업은 4차 산업혁명 대비를 목표로 대규모 데이터를 수집하고 통계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 지표를 마련하려 했다 .

이 사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보여준다. 정책이 성숙하려면 시간, 축적, 검증, 외부 평가라는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단발성 성과가 아니라, 반복적 검토와 보완의 과정이 정책의 신뢰를 만든다.

그러나 모든 정책이 이런 축적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정책이 다음과 같은 구조적 한계 속에 놓여 있다.

첫째, 순환보직 중심 인사 체계다. 공무원은 일정 주기로 부서를 이동한다.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문성과 지속성은 약화된다. 특정 정책의 설계 의도와 시행착오, 현장의 반응을 깊이 이해하기 전에 자리를 옮긴다. 그 결과 정책의 맥락은 개인과 함께 이동하거나 소멸한다.

둘째, 정권 주기와 정책 주기의 불일치다. 장기적 효과가 필요한 정책조차 단기 성과를 요구받는다. 새 정부는 차별화를 위해 기존 정책을 재포장하거나 중단한다. 이름이 바뀌는 순간, 축적된 평가는 단절된다.

셋째, 평가의 형식화다. 정책 평가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다음 설계에 실제로 반영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보고서는 작성되지만, 설계 매뉴얼이 수정되거나 예산 구조가 조정되는 경우는 제한적이다. 실패는 기록되지만 제도화되지 않는다.

넷째, 데이터와 현장의 단절이다. 최근 정부는 대규모 말뭉치와 데이터 기반 정책을 추진하며 체계적 분석을 강조하고 있다. “2022년 맞춤법 교정 말뭉치 연구 분석” 역시 자동화와 수작업 교정을 병행하며 데이터의 신뢰도를 높이는 절차를 강조했다 . 그러나 정책 전반에서 이런 데이터 축적이 일관되게 설계와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결국 문제는 ‘기억을 저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기억을 활용하는 구조’에 있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것을 다음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데는 인색하다.

 

 

전문가의 경고와 사회의 피로감

 

행정학자들은 이를 ‘조직 학습의 실패’라고 부른다. 조직이 경험을 통해 학습하지 못하면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업은 실패를 비용으로 인식하고 프로세스를 수정한다. 반면 공공 부문은 실패의 책임 구조가 분산되어 있어 제도적 학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실제 현장 공무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전임자가 했던 고민을 다시 반복한다”는 말이 적지 않다. 정책 설계 단계에서 과거 유사 사업의 한계와 위험 요인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서 검색은 가능하지만,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내러티브와 맥락은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다.

국민의 체감 역시 냉소로 이어진다. “또 바뀌겠지”, “몇 년 지나면 사라질 정책”이라는 인식은 정책 신뢰를 약화시킨다. 정책의 일관성이 약해질수록 민간의 장기 투자도 위축된다. 규제나 지원 제도가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기업과 개인 모두에게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복지, 교육, 산업 전환과 같이 장기적 축적이 필요한 분야에서 정책의 단절은 치명적이다. 제도가 정착되기도 전에 구조가 바뀌면, 현장은 혼란을 겪고 행정 비용은 증가한다. 그 비용은 결국 사회 전체가 부담한다.

행정 기억의 부재는 단순한 비효율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이며, 민주주의의 문제다. 국민이 정책을 믿지 못하는 순간, 정책은 설득력을 잃는다.

 

 

 

실패를 자산으로 만드는 국가가 되려면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단순히 “기록을 잘 남기자”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구조의 전환이다.

첫째, 정책 종료 후 의무적 ‘사후 학습 보고서’ 제도화다. 성과 평가를 넘어, 실패 원인과 설계 한계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차기 유사 사업의 필수 검토 항목으로 삼아야 한다. 단순한 평가서가 아니라, 설계 매뉴얼 수정까지 연결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둘째, 전문성 기반 인사 체계 강화다. 모든 공무원이 순환보직을 거쳐야 한다는 원칙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정 정책 분야에 장기적으로 축적된 경험을 가진 전문가를 육성하고, 핵심 분야에서는 최소 근무 기간을 보장해야 한다.

셋째, 정책 데이터의 통합 플랫폼 구축이다. 과거 사업의 예산 구조, 성과 지표, 실패 사례, 감사 지적 사항을 통합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신규 사업 설계 단계에서 이를 의무적으로 검토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정치적 차별화와 제도적 연속성의 균형이다. 새로운 비전은 필요하지만, 기존 정책의 축적을 부정하는 방식의 리셋은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초래한다. 이름이 바뀌더라도 구조와 교훈은 이어져야 한다.

정책 실패는 불가피하다. 사회는 복잡하고,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반복 여부다. 실패가 학습으로 전환될 때 국가는 성숙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정부, 다음 장관, 다음 부처 개편에서도 같은 문장을 다시 쓰게 될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과거의 실패를 반영해 구조를 수정했다”는 문장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행정 기억은 자연스럽게 쌓이지 않는다. 그것은 설계해야 할 제도다.

 

 

작성 2026.02.12 20:22 수정 2026.02.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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